대중(?)을 위한 융학파의 인간 심리에 대한 개론서라고 생각된다. 전문가들의 눈높이에 내려왔다고하더라도 그리 쉽지는 않다 그러나 충분히 흥미를 느낄만한 내용들이 많은 책이다. 다른 책보다 부분부분 호흡을 길게 가지고 끝가지 읽어내려가 내용정리라 생각하며 기록을 남긴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개인의 삶에서 끌어올려질 무의식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는 "꿈"이다. 현대에 와서 프로이트에 의해 무의식 세계의 이해의 중요성은 역설되어왔다. 무의식의 구성물로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적 억압으로만 간주했으나 융은 인간의 신화적 심성을 무의식의 중요한 내용물로 간주했다. 이 점이 프로이트와 학문적으로는 등으로 돌린 계기가 되었다.
현대인을 무의식의 세계로 인도한것이 프로이트 였다면 그 세계를 밝혀줄 등불을 만든것은 융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이러한 개인의 무의식의 탐험은 필요로 하는것일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융은 개인의 인생에 있어 무의식의 탐험은 인간의 본질로 가는 중요한 작업임을 강조한다. <개성화 과정>이라 표현한 것인데 각 개인의 뿌리로가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는 본질적인 목표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를 이루어 개인의 심연속에서 올라오는 소리에 귀기울임으로 개인의 인생은 확장되고 충만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앞서 내가 신화적 심성으로 얼버부리긴 했으나 인류의 진화사에 있어 신경계로 함께 진화되어 내려오는 '무의식의 틀'을 융은 <원형> 이라고 부른다. 즉 인류라는 종이 공유하는 보편적 무의식인 것이다.
개인의 무의식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꿈"이라면 사회라는 무의식 세게의 문을 여는 열쇠는 "신화"이다. 무의식이 의식의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며 함께가야할 세계이듯 신화는 사회가 존재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며 함께 가야할 사유체계였으며 역시 현실적이다. 이러한 두세계의 상보성은 대극의 합일을 통해 하나로 통합되는 이상향을 "신"적 또는 다양한 예술과 상징으로 표현된다.
뜬김없긴 하지만 이 정도로 내용만으로도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융에게 존경심을 표현한것은 당연하듯하다. 신화학 에서 융의 이론은 이런 맥락으로 궁합이 잘맞는 것이다. 들은 이야기로는 융의 책들이 오컬트 분류에 꼽아져 있다고하던데 최대한 과학적 논리와 사실들을 근거로 자신의 사상을 이루어 갔던 학자라고 융 학파의 동료들은 인정하였다.
앞으로 융을 계속 읽어나갈 생각이다. 충분히 매력적인 끌림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제도종교가 왜 이렇게 황폐해 졌으며 신앙인들의 상상력은 왜 이리 건조해졌는가? 융은 그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 했다. 부처나 그리스도는 소위<개성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숙명대로 자신의 길을 갔으나 역사적으로 보았듯이 공교롭게도 사람들은 그리스도 부처가 같던 길만 보고 흉내만 냈을 뿐 그들이 보여준 범례대로 스스로 개인의 숙명의 길을 찾으려 하지않고 그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역시 이말에 동의하며 자신만의 십자가길을 가야하는 것이며 자신만의 열반의 길로 가야한다는 말에 수긍이 간다.
조셉 캠벨이 예전 이런 질문을 받았다. 2천년전 한 남자가 십자가형을 받아 죽고 3일만에 부활에 승천했다는 것은 사실이며 당신은 믿습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어느 책에서 캠벨은 이렇게 답했다. 그 사건이 나의 내면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나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변증론적인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의 신학적 대답 같기도 하지만 캠벨은 그 사건의 상징을 현실의 자신의 삶속에서 끌어냈을때 그게 의미가 있지 않겠냐 라는 뜻에서 그의 신화에대한 시선을 고려해 그리 대답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다시 나의 관심사 신화라는 주제에 있어 융 학파의 <원형>에 의한 인간의 정신과 심리적인 신화의 정의는 또다른 관점 중 하나게 된다.
막스밀러-언어 질병설 , 우의설 , 테일러-애니미즘, 프레이져의 - 사회진화적 , 레비스트로스의 - 구조주의 적 관점 , 말리노프스키의 - 기능주의적 관점 , 엘리아데- 바빌로니아 학파 관점이나 신화는 역사인 독특한 관점 등등에 하나 더 추가된다 칼 융으로 확장된 - 신화의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이 추가되언다.
신화는 그자체가 극도의 메타포와 집단의 문화에 영향을 받으므로 어느 하나의 학설이 전부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은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맥락적으로 분석되어야한다.
레 투르아 프레르 동굴의 벽화
구석기 시대 동굴 벽화들만 봐도 흥미롭다. 이 동굴은 동네 아이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인류가 바라본 생명과 우주는 아주 오래 전부터 다른 종과는 다른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과 상징 - 칼 구스타프 융 외 지음, 이윤기 옮김/열린책들 |
책속남기고 싶은 내용
-<무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논파할 논리적 근거는 얼마든지 있다. <무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새것,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는 낡은 <쇄신 공포증misoneism>에서 비롯된다.
-꿈의 일반적인 기능은 꿈 소재를 산출함으로써 심적 평형psychic equilibrium을 회복시키는 데 있다. 꿈은 이로써 섬세한 방법으로 심리적인 균형을 이루게한다. 나는 이것을, 우리 심리 구조에서 꿈의 보완적(혹은 상보적) 역할이라고 부른다.
-생물학자가 비교 해부학의 지식을 필요로 하듯이 심리학 자도 <마음의 비교 해부학>을 필요로 한다. 이것 없이는 심리학자도 마음을 연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심리학자는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꿈을 비롯한 무의식의 산물에 관해 경험을 넉넉하게 쌓아야 할 뿐만 아니라 넒은 의미에서는 신화에 대한 지식도 쌓아야 한다. 이런 준비가 없이는 아무리 심리학자라고 하더라도 사례 간의 유사성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니까 무의식의 산물과 신화에 대한 지식 없이는 예컨데 강박 신경증 환자와 신들린 환자 사이의 유사성을 가려낼 수 없는 것이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현대 문명의 충격에 노출될 때 미개인 사회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 문명에 노출될 경우 미개인들은 자기네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그들의 사회 조직은 붕괴되며, 결국 그들은 도덕적으로 무너지고 만다.
-카톨교회가 <하느님이 보내신 꿈 sommia a Deo missa>의 존재를 인정 하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카톨릭 사상가들은 이 꿈을 이해하기는 커면 이해해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개신교 교의나 논문이 꿈에서 <하느님의 소리vox Dei>를 듣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인정할 만큼 저자세를 취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학자가 하느님의 존재를 진실로 민드는다면, 무슨 권위로 하느님이 꿈을 통해 인간에게 말을 걸 수 있다는 가정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고대인이나 원시 미개인의 신화와 무의식이 산출하는 상징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라딘 박사는 영웅담 전개를 특징에 따라 네 주기로 분류하고 이것을 각각, <장난꾸러기 주기>,<산토끼 주기>,<붉은 뿔주기>,<쌍둥이 주기>라고 이름 붙였다.
-<그림자> 의식속의 어두운 측면이다.
-영웅의 처녀 구출은 어머니상이 지닌 <탐욕스러운>측면에서 자기 아니마를 해방시키는 것을 상징한다.
-오르페우스교와 기독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비록 신비스러운 형식으로 승화되어 있기는 해도 오르페우스교의 밀의는 디오니소스교의 전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오르페우스교의 정신적 기동력은 반신 demi-god에서 비롯되는데 여기에는 농업에 그 뿌리를 둔 종교의 중요한 특징이 보존되어 있다. 그 특징은 바로, 계절 주기마다 등장하는 풍요의 신들이 상징하는 오래된 패턴, 다시 말해 영원히 되풀이 되는 탄생과 성장과 성숙과 소멸의 순환이다.
-오르페우스교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영원한 순환에 초점을 맞춘 과거 지향적인 종교인 데 반해, 기독교는 입문자에게 전지전능한 하느님과의 궁극적 결합의 약속을 강조하는 미래 지향적인 종교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에서는,<어머니 자연>은 그 아름다운 네계절을 거느리고 뒷전으로 물러난다. 기독교의 교리가 제공하는 것은 영적인 확신이다. 그 까닥은 <사람의 아들>인 그리스도는 곧 하느님의 아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융 박사나는 무수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으 ㅣ꿈을 연구함으로써,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꿈은 꿈을 꾼 사람의 생활과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거대한 조직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밝혀 냇다. 그는 또 전체적으로 볼 때 일련의 꿈은 하나의 배열이나 패턴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는사실도 알아냈다. 바로 이 패턴을 융 박사는 <개성화 과정>이라고 부른다.
-개인의 내부에 있는 이 같은 고유성uniqueness의 실현이 바로 개성화 과정의 목표이다.
-자기 자신의 무의식적 경향을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할 때, 우리는 그것을 <투사>라고 부른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그 존재의 뿌리로는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얼간이가 때로 너무나 어처구니 없이 과격한 해동을 하여 내적인 소리가 그 존재를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융 박사는 마음의 중핵은 보통 그 자신을 4중 구조로 표현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동시에 숫자 4라는 숫자는 아니마와 관련이 있다. 그 까닭은, 융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아니마는 4단계에 걸쳐 발전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융 박사는 <동시성, synchronicity>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놓았다. 이 개념은 인과적으로는 무관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의미있는 우연의 일치>를 뜻한다. 여기에서 <의미 있는>이라는 말이 특히 강조되고 있다.
-원시 사회의 추장이 할례 의례에서 동물로 분장하고 등장하면 대개의 경우 동물로 가장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동물 그 자체가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할례를 시행하는 동물의 영, 즉 무시무시한 악마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행사를 벌일 동안 추장은 그종족과 일족의 선조를 구현하고 대표하는 동시에 스스로 원초의 신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추장은 <토템>동물을 대표하는 동시에 <토템>동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트루아 프레르 동굴에 잇는, 춤추는 반수반인은 가장을 통해 동물의 영으로 둔갑한 추장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것이다.
-태초의 신화는 대부분이 동물과 관계되어 있다. 이러한 동물은 풍요와 창조를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 .가령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는 황소를 제물로 받고 토지를 비옥하게 해주었다 .기독교 전설에 나오는 성 게오르기우스가 용을 퇴치하는 이야기도 원시 시대 공희제의 재현인 것이다.
-기독교 미술에서 중심적 위치를 상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상이다. 십자가도 카롤링거 왕조 시대까지는 등변형 십자가, 혹은 이른바 <그리스 십자가>인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그때의 십자가에는 만다라 의미가 간접적으로나마 표현돼 있었다. 그러나 세우러이 지남에 따라 십자가의 중심부가 점점 위로 이동하고 가로대와 기둥의 형태를 띠면서 오늘날과 같은 라틴 십자가 모양을 이루게 된다 .십자가의 이런한 변천은 기독교 정신이 중세의 융성기에 이르기까지 내적인 발달을 이루어 온 과정에 대응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십자가의 이런 변천은 인간의 중심과 인간의 신앙이 대지에서 정신적 영역으로 <상승>한 과정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한 경향은 <내 나라는 이세상이 아니다라고 한 그리스도의 말을 구현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지상의 삶과 이승과 육체는 마땅히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 이었다. 중세의 희망은 이 같으 피안의 세계를 향하고 있었는데, 그 까닭은 희망이 성취된다는 약속은 천국에서만 이루어 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대 미술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 결국 예술가에게는,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의 창작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예술가가 무의식으로 작품을 만든다면 그 작품은 자연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이며, 이 자연의 법칙은 심층적으로는 마음의 법칙과 일치한다. 물론 역으로, 마음의 법칙 역시 자연의 법칙에 일치한다.
-융 박사는 「동시성:비인과적인 연결 원리」라는 논문에서 이 난해하고 새로운 이론을 소개한 바 있다. <동시성>이란, 우리 마음속에는 마음의 상태와 현상계의 일을 연결하는 <내부의 무의식적지식>이 존재한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바로 이러한 <내부의 무의식적 지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우발적>인 것, <우연의 일치>인 것 같은 사건이 실제로는 상당히 중요한 심리적인 의미를 지닐수 있으며, 그 의미는 종종 외적 사상과 일치되는 꿈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리학자 파울리는 생명의 진화 개념은 새로운 발견을 통해 수어되어야한다고 지적한다. 즉 ,무의식적인 마음과 생물학적 과정의 상호 작용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최근까지는 종의 돌연변이는 임의로 발생하는 현상이며, 자연 선택에 의해 <의미 있는> 종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종은 도태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진화론자들은 순전히 우연을 통해서만 이러한 선택 및 도태현상이 있었다면 그것은 지구가 비롯되었다고 여겨지는 시기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런 일이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융 박사의 <동시성>개념은 어쩌면 이러한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열쇠노릇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어의 상보성 개념은 융 학파 심리학자들의 관심을 끈다. 그 까닭은 융 박사 자신이 의식적인 마음과 무의식적인 마음의 관계를 상호 대립하는 상보적인 한 켤레의 마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심리학과 물리학 개념이 이 예기치 않은 대응은 융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물리학과 심리학이 탐구하는 두 현실의 영역이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일체성>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융박사는 자신이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기물 구조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 확신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억압,승화,보상 심리 같은 개념으로 마음의 얼개를 설명하는 부분, 그 둘은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성적 충동으로 마음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은 초기에는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과 동일한 궤도를 좇는다. 무의식이 어떤 마음의 에너지가 되어 끊임없이 의식으로 침윤하는 현상에 주목하는 데도 이 양자는 궤도를 같이 한다. 그러나 무의식의 내용물의 정체를 설명하는 대목에 이르러 융은 프로이트 정신 분석학의 궤도에서 이탈한다. 융은, 무의식의 내용물이 성적인 충동이라는 프로이트의 설명에 동의할 수 없게 되는것이다. 융은 무의식의 내용물 중 우리가 주의 깊게 주목해야 하는것이 신화적 요소라 주장한다. 프로이트도 신화적 요소가 무의식의 내용물을 구성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신화적 요소를 <고태의 잔재>라고 부르는데,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에서 이 <고태의 잔재>는 인간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하찮은 내용물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대목에서 융은 프로이트의 이론에 크게 반발한다.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하는 것은 1913년, 융의 나이 서른여덟 살 때의 일이다. 융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이 신화시대부터 오랜 진화의 과정을 밟아 오는 동안 신화적 요소는 <바탕이 되는 틀>이 되어 무의식의 가장 중요한 내용물을 구성한다. 융은 이 바탕이 되는 틀을 <원형>, 신화시대부터 인간이 무의식 안에 간직하고 있는 거대한 신화적 요소의 덩어리를 <집단무의식> 혹은 <보편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원형> 혹은 <원형적인 요소>가 우리의 마음 바닥에 어떤 모습으로 고여 있는지,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문턱을 넘어 우리의 삶에 간섭하는지 그 얼개를 설명한 것이 바로 『인간과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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