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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꿈 사상

category 책/신화,종교 2015. 8. 23. 18:02

카를 융 - 기억 꿈 사상기억 꿈 사상 칼융의 자서전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처음으로 읽어본 칼 융의 책이다. 융의 자서전 인데 굉장히 독특했다. 4살때 꿈을 80넘어까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정신과 의사이고 인간 정신을 연구하는 학자라고 해도 스스로의 내면에 이렇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모습들은 정말 사상의 거인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독특하다고한 이유는 이 책에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에너지와 융의 촛점은 자신의 외적사건들이 아니라 대부분 내적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에서 이 책은 자서전이 아니라 융의 정신 해설서가 아닐까 생각이든다. 자신의 인생을 "나의 인생은 무의식의 자기실현 역사이다." 라고 말한 이유를 이 책을 읽고난 후 알 수 있었다. 심리학 에서 무의식의 중요성에 대한 첫 포탄을 쏘 연것은 프로이트 였으나 성적 억압으로 환원시킨 그 의 해석과는 달리 융은 "원형"이나 "개인화" 같은 다른 개념으로 무의식 세계를 연구한것같다. 이러한 학문적 해설은 나 같은 사람이 하기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 갈 뿐이지만 무생물에게 까지 연속성을 가지고 무한성을 갖는다는 그의 무의식 세계에 대한 설명은 흥미롭고 때론 오컬트적이기도 하다.


그가 제시한 심리학 개념 중 하나인 "원형"은 민족이나 집단이 원시로부터 공유해온 무의식 세계의 정신DNA이며 이에대한 표현은 "신화"이다. 개인의 무의식적 메시지가 꿈이라면 집단의 무의식 세계의 메시지가 "신화"인것임으로 융의 이론을 통해 인류의 정신분석에 있어 신화의 중요성은 부각되어졌다. 조셉 캠벨이 칼 융의 중요성과 존경의 마음을 보낸것은 신화학자로서 신화 분석의 심리학적 해석에 있어 기본 이론을 융 파의 심리학 이론에 기초해서 이기도 하겠지만 융의 정신세계의 깊이가 캠벨의 마음을 사로 잡았으리라 생각한다. 이건 나의 생각이다.


융이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것 같아 보이는 영혼의 영원성이나 무한성의 개념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정신세계에 대한 매혹적인 그의 설명엔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설명은 종교에서 회자되는 "신"개념이나 "진리" 개념과 비슷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것 같아 그 끌림은 더한다. 오컬트나 극단적 신비주의로 떨어질 것 같은 위험한 줄타기를 하다 금세 한쪽으로 떨어지기 쉬어보이는데 칼 융이 경험하고 갓던 길이라면 따라가 볼 만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천박한 유물론으로만 모든 정신세계를 설명하거나 개인의 사소한 종교적경험에 영적으로 흥분에 취해있는 것으로 살아가는 유형은 아니지 않겠나 싶다. 그런 부류는 정말 싫은게 사실이다.  

융의 말대로 자신의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에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풍요롭고 안정된 삶을 사는것이 가치 있는일이지 않을까 한다. 조셉캠벨이 말한 진정 영적인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삶도 소홀히 하지 않기때문이다.

융 과의 첫 만남으로 앞으로의 만남들이 더 설렌다. 어려운 심리학 이론들은 내가 이해를 못하겠지만 그의 내적경험이나 이론을 통해 나의 감정들은 틀림없이 자극을 받아 울렁거릴것 이기때문이다.

처음으로 융과 이 정신세계의 너울을 함께 하고자 한다면 이 책 기억.꿈.사상으로 하면 어떨까?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8점
칼 구스타프 융 지음, 조성기 옮김/김영사


책 속 남기고 싶은 글귀 

-쇼펜하우어의 사상체계에서 근본적인 결함을 발견했다고 믿어졌다. 그는 순수한 본체, 즉 '사물 그 자체'를 인격화하고 그 성질을 규정하여 형이상핮거인 진술을 하는 심각한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칸트의 인식론에 의해 밝혀진 것으로, 그 인식론은 어쩌면 쇼펜하우어의 '염세적인' 세계상보다 더욱 큰 깨달음을 나에게 주었다.

-이 꿈은 나에게 심오한 계시와도 같았다. 그때 나는 제1의 인격이 빛을 운반하는 자이며 제2의 인격은 그림자처럼 제1의 인격을 따라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의학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병든 정신과 '정상'이라고 일컫어지는 의사의 정신 간의 대화이며, '병든'인격과 치료자 

인격 간의 대결이다. 그런데 치료자 인격이라는 것도 병든 인격과 마찬가지로 원래 주관적인 것이다.

-환자를 연구함으로써 나는 피해망상과 환각이 일종의 의미의 핵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인격, 하나의 인생사,하나의 희망과 욕막이 그 배후에 있었다. ..... 사실 우리는 정신병에서 새로운 것이나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과 마주치게 된다.

-소녀시절에 당했던 근친상간으로 인해 그녀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굴욕을 느꼈지만 환상의 세계에서는 고양된 기분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소위 신화의 영역으로 엶겨진 것이다. 근친상간은 전통적으로 왕과 신들의 특권이기 때문이다.그 결과 세상으로부터 철처히 소외된 상태, 즉 정신병이 생기고 말았다. (어떤 여자 환자 사례)

- 동시성현상.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집단 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의 상태라고 불렸던 것의 기초다.

-프로이트는 그 자신이 나에게 말한 것처럼 니체의 저서를 읽은 적이 전혀 없었다. 이제 나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니체의 권력원리의 우상화를 보상하는 정신사의 교묘한 책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문제는 '프로이트 대 아들러'가 아니라 

'프로이트 대 니체'임이 분명했다.

-신성한 힘의 체험으로 마음이 격력히 동요하게 되면 사람들이 매달려 있는 실이 끊어질 위험이 항상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은 절대적인 긍정으로, 또 다른 사람은 그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부정으로 빠지게 된다. 신성한 힘은 사람을 극단으로 잘못 인도하는데 그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작은 진리를 진리의 전부인 양 여기도록 하고 작은 잘못을 치명적인 잘못으로 여기도록 한다.

-나의 꿈은 이와 같이 일종의 인간정신의 구조적 도식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정신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그 꿈은 개인정신의 밑바닥에 있는 선험적이고 집단적인 것에 대한 최초의 암시였다. 나는 이것을 우선 정신기능의 초기양식으 흔적이라고 보았다. 그후 경험이 쌓여감에 따르, 그리고 더욱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기초로 해서 나는 그것을 본능의 형태, 즉 원형(原型)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나로서는(프로이트와 다르게) 근친상간이 개인적인 착종을 의미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개 근친상간은 고도의 종교적 내용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것은 거의 모든 창조신화와 그외 수 많은 신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환상에 관한 작업을 하던 바로 그 무렵, 물론 나는 '이승'에 발판이 필요했다. 그것은 가족이며 직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낯선 내면세계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대극으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었다. 가족은 언제나 내가 돌아올 수 있는 기반...

-우리가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대략 1918~1920년에 나는 정신적 발달의 목표가 '자기'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직선적 발달은 없고 다만 자기를 중심으로 한 순환이 있을 뿐이다. 단일형의 발달도 있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시작단계에서나 있는 일이고, 그 뒤에는 모든 것이 중심을 향한다. 이와 같은 인식은 내게 확신을 주었고 차츰 내적 평안이 회복되었다. 자기 표현인 만다라로 인하여 나로서는 궁극적인 것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환상탐구에 몰두하면서 나는 무의식이 변환하기도 하고 변환을 야기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을 배워서 알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의식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무의식 내용에 대한 자아의 관계에 의해 정신의 변환과 발달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 개인의 경우 그 과정을 꿈이나 환성에서 읽어낼 수 있다. 집단적인 세계에서는 그것이 반영된 표현이 특히 다양한 종교체계와 종교상징의 변환에서 발견된다.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변환 과정에 대한 연구와 연금술의 상징에 대한 이해를 통해 나는 '개성화과정'이라는 내 심리학의 중심개념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가 내적감각으로 지각하거나 예감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외부의 현실과 자주 상응하게 되는 것을 동시성 현상이라고 한다. (융은 이 동시성 현상을 자주 경험했다. 개인적으로 이해가 안된다.....경험을 통해서 만 알 수있는부분이라.) 

-"우리는 .... 그들이 넋이 나간 사람들이라고 확신하오"  나는 그에게 왜 백인이 모두 넋이 나간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 나는 몰라서 물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어디서 생각하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나는 오래 생각에 잠겼다.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가 진정 백인의 모습을 나에게 묘사해준 셈이었다.이 인디언은 우리의 아픈데를 찔렀으며 우리가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부분을 건드렸다.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나는 부처의 삶을 개인의 인생 전체를 통해 스스로를 주장한 '자기'의 실현으로 이해했다 .부처에게 '자기'는 모든 신을 넘어서, 특히 인간실존과 세계의 정수(精髓)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세로서 존재 자체의 측면뿐 아니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그의 인식도 함께 포괄하고 있다. ..... 그리스도 역시 부처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구현자다. 하지만 전혀 다른 뜻에서 그러하다. 둘 다 세상을 극복한 자들이다. 부처는 이를 테면 이성적 통찰로써, 그리스도는 숙명적인 희생으로써 그 일을 이루었다. 기독교에서는 더 많이 고통을 겪는 데 주안점을 두고, 불교에서는 더 많이 깨닫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부처는 역사적 인격체이므로 사람들에게 좀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역사적인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므로 파악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사실 그리스도 자신도 스스로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내부로부터 자신에게 부과된 일인 것처럼 자신이 희생당해야 한다는사실만을 알았을 뿐이다. 그의 희생은 숙명으로 그에게 닥쳤다. 부처는 통찰에 따라 행동했다. 부처는 자신의삶을 살다가 나이 들어 죽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한 기간이 무척 짦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는 모든 기도교인 안에 완전한 인격체로 살아 있는 모범상이다. 그러나 역사적 발전은 '그리스도 모방'으로 이어져, 개인이 전체성에 이르기 위해 자기 고유의 숙명적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간길을 본받아 따라가려고한다. 부처는 모방의 대상인 모밤상이 되었고, 그럼으로써 부처 자신의 이념은 약화되었다. '그리스도 모방'이 기독교 이념의 발전을 치명적으로 가로막은 것처럼 알이다.  부처가 바로 그 통찰로 인해 브라마의 신들을 능가하듯이. 그리스도도 유대인들에게 "당신들은 신들이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소위 '기독교적' 서구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대시 세계파괴의 가능성으로 내딛고 있다.

-남자의 아니마는 현저히 역사적인 성격을 띤다. 아니마는 무의식의 인격화로 역사와 선사에 깊이 물들어 있다. 아니마는 과거의 것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남성이 그의 선사에 관해 알아야 할 것들을 남성속에서 대신 보충해주고 있다.남성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이미 있었던 모든 삶이 아니마다.

-나에게 남아 있는 그것이 바로 '나(Ich:'자아')'라고 말이다. '나'는 이를테면 남아 있는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나의 역사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참으로 나란느 절실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나(자아)는 성취된 것과 지금까지 있었던 것의 그와 같은 묶음이다." 이런 체험은 나에게 극도의 결핍감을 안겨주면서도 동시에 커다란 만족을 주었다. 내가 요구하거나 원하는 것은 더이상 없었다.

-사람들은 '영원'이라는 표현을 꺼려한다. 하지만 나는 그 체험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하나인 무시간적인 상태의 지복이라고밖에 달리 일컬을 말이 없다.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거기서 하나의 객관적 전체성으로 통합된다. 아무것도 더이상 시간으로 쪼개질 수도 없고 시간개념에 따라 측정될 수도 없었다.

-사람이 개성화의 길을 가는 중에, 즉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과오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원만해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과오나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사람들은 아마도 안전한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죽은 자의 길일 것이다. 그러면 더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어떻든 그건 바른 길이 아니다. 안전한 길을 가는 자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인생이 현존을 넘어서 무한정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나의 가설은 무의식이 이를테면 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는 암시의 도움으로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주 오랜 옛적부터 어떤 잠재의식적 과정의 진행을 표현하는 신화소(神話素)가 있었지만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죽음은 역시 무섭도록 가혹하다. 여기에 사람들이 속아서는 안된다. 물리적인 사건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인 사건으로 더욱 그러하다. 죽음의 야만성과 전횡성은 사람들을 비통하게 만들어, 사람들은 자비로운 하느님도 없고 저의나 선도 없다고 단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 서보면, 죽음은 하나의 즐거운 사건으로 여겨진다. 영원의 관점ㅅ에서 죽음은 일종의 결혼이며 융합의 비의다. 영혼으 이를테면 자신에게 결여된 반쪽에 도달하여 통합을 이루게 된다. 경건한 유대 신비주의자 시몬 벤 요카이가 죽을 때 그의 친구들은 그가 결혼식을 올린다고 말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지방에서 만령절에 무덤으로 '소풍'을 가는 풍습이 있다. 이 모든것은 죽음이 본래 하나의 축제라는 지각을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데몬이니 신이니 하는 개념의 이점은 그것들이 대상의 객관화, 즉 인격화를 보다 잘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어떤 학문도 신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어떤 학문으로도 신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삶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고안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종의 '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의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화적인 인간은 '그 너머로 나가기'를 갈망하지만 학문적인 책임을 고려하는 인간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이성의 차원에서는 '신화화'야말로 쓸모없는 사변일뿐이다. 하지만 감정의 차원에서는 치유를 가져오는 활동력이며 인간존재에 광채를 부여한다. 사람들은 그 광채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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